한국안전시민연합

KCSU NEWS

홈 > 연합활동 > 보도자료
보도자료

核에는 核! '공포의 카드' 뽑아든 슈미트 전 총리의 교훈

최고관리자 0 1,809 2017.08.27 19:59

核에는 核! '공포의 카드' 뽑아든 슈미트 전 총리의 교훈  

                동·서독 통일의 숨은 주역인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
흔히들 국제공항에는 한 국가의 국부(國父)나 위대한 지도자들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 미국 워싱턴의 로널드 레이건 공항과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 인도 뉴델리의 인디라 간디 공항,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독일의 경우 지도자의 이름으로 명명된 곳은 지난 7월 주요 20개국(G20)정상회의가 열린 함부르크의 헬무트 슈미트 공항밖에 없다. 독일에는 철혈재상이라는 말을 들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비롯해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 동방정책으로 통일의 초석을 놓은 빌리 브란트 전 총리,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총리 등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나 정치인들이 있다. 그런데도 함부르크 공항이 슈미트 전 총리(1917~2015)의 이름으로 불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함부르크가 슈미트 전 총리의 고향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의 정치역정(歷程)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슈미트는 냉전이 한창이던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서독을 이끌었던 중도좌파 성향인 사회민주당(SPD·사민당) 출신 총리였다. 1919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슈미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지만 종전 후 영국군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됐다.
 
1946년 사민당에 입당해 당 학생조직의 의장을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함부르크 주정부에서 내무장관 시절이던 1962년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던 엘베강 대홍수 때 월권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재난대책을 지휘하면서 경찰과 군 병력을 신속히 투입해 수천 명의 인명을 구출해냈다. 이후 그에게는 ‘해결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실제로 재임 시절 각종 위기를 지혜롭게 돌파했던 슈미트 전 총리는 지금도 ‘최고의 현자(賢者)’라고 불린다. 브란트 총리 집권 시절 국방장관과 재무장관을 역임한 그는 1974년 갑작스레 총리직에 올랐다. 브란트 총리가 자신의 비서인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격 사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민당은 그를 총리로 선출하고 차기 총선의 지휘 책임을 떠맡겼다. 당시 서독은 상당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무엇보다 경제 상황이 매우 나빴다. 경제성장률은 낮았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실업률은 고공행진을 했다. 대규모 경기부양책 때문에 재정적자도 심각했다. 게다가 제1차 오일쇼크로 경제난은 더욱 심화됐다. 그는 통상외교와 다자간 협력을 통해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국 보호주의를 막기 위해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이 참석하는 주요 6개국(G6) 회의를 제안했다.
 
 이후 G6 회의는 1976년 캐나다의 합류로 G7 체제로 개편됐다. 그는 또 환율 안정을 위해 유럽 국가들의 통화가치 균형을 유지하는 공동 변동환율 시스템을 제안했다. 이후 ‘스네이크 시스템’이라는 이 제도를 토대로 유럽통화체제(EMC)가 도입됐다. 그의 제안은 1992년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화가 출범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또 다른 과제는 극좌(極左) 강경 학생운동 세력들이 만든 적군파(RAF)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적군파는 사회 주요 인사들에 대한 납치와 암살 등은 물론 각종 테러까지 자행했다. 그는 적군파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하고 무관용의 원칙을 보였다. 적군파가 인질을 납치해도 협상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적군파가 1977년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공항에 착륙해 있던 이 여객기의 승객과 승무원들을 구해내기 위해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만약 일이 잘못되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각오했다.

그는 동서 데탕트를 통해 유럽 전역의 평화질서가 확산돼야 한다는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75년 헬싱키협약 체결을 위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서 이동의 자유, 동서 간 커뮤니케이션 자유, 인권 보장을 주장했다. 당시 옛 소련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헬싱키 협약에 서명했다. 이후 소련은 1980년대 후반 동독과 동유럽 국가의 인권운동 단체들의 활동을 보장해야만 했다. 동유럽 민주화 운동은 그의 혜안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SS-20 vs 퍼싱-II

슈미트 전 총리는 브란트 전 총리의 동독과의 교류협력 및 소련의 관계정상화를 뜻하는 동방정책도 계승·발전시켰다. 동·서독 정상회담, 서독·소련 정상회담을 열었고 1974년 동·서독 수도에 대사관 격인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동·서독 화폐 1 대 1 교환, 동독 정치범 석방을 위한 차관 제공, 동독에 대한 무이자 신용대출 허용, 동독 인프라 구축을 통한 교류 확대 등을 추진했다.
 
그는 동·서독 관계의 핵심은 ‘현찰을 통한 인권개선’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주민의 생활수준을 개선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지만 필요한 자금을 충당할 수 없었다. 헬무트는 이를 간파하고 호네커 서기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반대급부를 철저하게 받아냈다. 서독은 1972년부터 1989년까지 140억마르크를 동독에 제공했는데이 중 34억마르크는 정치범 석방의 대가였다.
 
서독은 또 1975~1980년 8억5000만마르크를 동독에 무이자로 빌려줬다. 이후 동독은 서독 여행자들의 국경 통과 절차를 개선했고 국경에 설치된 총기와 지뢰를 제거했다. 서독은 동독 고속도로에 대한 연간 운행료 5억마르크를 지불했는데, 이런 조치도 동·서독 주민들의 상호 교류와 방문 및 미래의 통일을 위해서였다.

특히 슈미트 전 총리는 재임 시절 최대의 안보위기를 전략적 결단으로 극복했다. 안보위기는 소련이 1975~1976년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인 SS-20 650기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일원인 동독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에 배치한 것을 말한다. SS-20은 이동식 발사대를 통해 움직일 수 있으며, 2단 고체 로켓에 사거리가 5000㎞이고, 핵탄두를 3개 탑재할 수 있는 가공할 무기였다.
 
소련의 SS-20 배치는 1972년 5월 미국과 체결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을 위반한 것이 아니었다. SALT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장거리폭격기 등 전략무기의 수량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협정이었기 때문이다. SS-20은 서독을 비롯해 서유럽의 모든 목표를 사정권에 두지만 미국에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다. 소련이 SS-20을 배치한 것은 미국과의 군축협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서유럽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서독은 물론 서유럽에는 이에 대항할 만한 핵무기가 전혀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슈미트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협상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슈미트 총리는 1977년 영국 런던의 국제전략연구소 연설에서 “소련이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에 배치한 최신형 중거리탄도미사일 SS-20이 유럽의 군사 균형을 결정적으로 깨뜨렸기 때문에 강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천명했다.
 
그는 “소련이 동독에서 SS-20을 철수하지 않을 경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서독도 미국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인 퍼싱-Ⅱ를 배치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소련의 도발에 대해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던 미국은 슈미트 총리의 연설에 반색했다. 미국은 서독 국민들의 반전·반핵과 평화운동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런던 연설은 서독 내에서 반전·반핵과 평화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반전·반핵 단체들이 대대적으로 미국의 핵미사일을 배치할 수 없다면서 시위를 벌였다. 본에서 열린 평화운동에는 30만명의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이들은 “소련과 동독이 핵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미국의 허수아비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극좌 성향의 학생들은 슈미트 총리를 암살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사민당 의원들도 대부분 반대했다.
 
 사민당 총재인 브란트조차 반대했다. 동방정책을 기획했던 에곤 바는 슈미트 총리가 서독 땅에 ‘동독을 협박하는 전쟁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슈미트 총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민당 내의 환경주의자와 평화주의자가 반핵을 기치로 내걸고 탈당해 녹색당을 만들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미국의 퍼싱-Ⅱ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면서 원인을 제공한 소련의 SS-20 배치를 비판하지 않는 반대파들의 이중성을 질타했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슈미트 총리의 단호한 결단에 놀라기도 했다.

더블 트랙 디시즌

나토는 1979년 12월 12일 슈미트 총리의 제의에 따라 ‘공포의 균형’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른바 ‘이중결정(Double-Track Decision)’ 전략이었다. 나토는 “중거리 핵무기가 없는 평화로운 유럽이 목표지만, 동독 등 동유럽에 배치된 핵무기가 폐기될 때까지는 불가피하게 서독 등 서유럽에도 동일한 수준과 규모의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의미에서 ‘이중결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토는 우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유럽에 중거리탄도미사일 배치를 상호금지하기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나토는 그러면서 4년 내에 상호금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서독에 퍼싱-Ⅱ 108기를, 영국·이탈리아·네덜란드 등 회원국들에 중거리 크루즈미사일인 그리폰(Gripon) 460기를 전면 배치한다고 결정했다. 퍼싱-Ⅱ 미사일은 이동식 발사대로 움직이며, 2단 고체연료 로켓에 사거리가 1800㎞이고, 5~80㏏의 W85핵탄두를 탑재했다. 그리폰 미사일은 사거리가 2500㎞이고, 0.2~150㏏의 W84핵탄두를 탑재했다.

슈미트 총리는 1980년 총선에서 반전·반핵 단체들과 일부 극좌 대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1976~1979년의 경제 성적이 좋았던 데다 안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민당은 연정을 구성했던 자민당과 심각하게 대립했다. 그 이유는 사민당 내에서 퍼싱-Ⅱ에 반대하는 강경 좌파그룹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중도우파인 자민당이 사민당과의 연정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틈을 노려 기민당의 콜 총재가 자민당에 연정을 제의했다. 결국 자민당은 사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하고 콜이 이끄는 기민-기사당과의 연정 구성에 합의했다. 슈미트 총리는 1982년 연정 붕괴와 함께 연방하원에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자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나토의 이중결정 전략에 대해 처음에는 아예 묵살했고, 2년 뒤 시작된 협상에서도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슈미트 전 총리의 뒤를 이은 콜 총리는 결국 퍼싱-Ⅱ 미사일을 실전 배치했다. 연방하원은 1983년 11월 22일 찬성 286, 반대 225로 이를 승인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10월 22일 평화운동 집회에는 전국에서 150만명이 모여 퍼싱-Ⅱ 미사일의 서독과 유럽 배치를 강력 반대했다. 109㎞에 달하는 인간 띠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서독에 배치된 퍼싱-Ⅱ의 위력을 두려워하던 소련이 불과 4년 후인 1987년 미국과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을 체결했다. 실제로 퍼싱-Ⅱ는 발사 7분 만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미사일 방어체계가 없었다. 미국의 ICBM이나 SLBM은 소련이 조기경보레이더로 포착할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보복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 하지만 서독에 배치된 퍼싱-Ⅱ는 1800㎞ 떨어진 모스크바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조기경보레이더로 탐지할 수 없었다. 냉전 종식 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슈미트 전 총리에게 당시를 회고하며 “모스크바는 미국의 퍼싱-Ⅱ 미사일로부터 무방비 상태였고, 방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에 슈미트 전 총리는 “그게 바로 내가 의도했던 것이었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콜 전 총리는 2009년 10월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 행사에서 “나토의 이중결정 전략이 없었다면 1989년 베를린장벽이 해체되지도, 1990년 동·서독 통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독에 소련의 핵무기가 그대로 배치돼 있었더라면 통일이 어려웠을 것이란 말이다.

적(敵)의 핵무기에 대한 유일한 억제 수단은 핵무기밖에 없다. 핵전쟁 위기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미국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는 “인간이 그 파괴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무모하고 무지한 짓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포의 균형’만이 유일한 대응전략이다.
 
전범국가라는 굴레 때문에 핵무장이나 군비확장 문제에서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서독도 비록 미국의 핵무기를 배치한 것이기는 하지만 적의 핵무기에 대해 핵무기로 맞섰다는 것은 북한의 핵 위협에 직면한 한국으로선 교훈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핵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해온 좌파 정당 출신의 총리가 국가 안보를 위해 앞장섰다는 것은 지도자의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Comments